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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귀염뽀짝의 제안에는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헤카무트의 거처에 침입, 놈의 사도인 샬바르인 척 조심스럽게 연기를 한다면? 최소한 무턱대고 열쇠를 가지고 위험을 짊어지는 것보다 나을 거다.
일단 헤카무트 놈들을 속일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하면 되니까. 샬바르의 기억과 스킬도 흡수했으니, 조심 또 조심하면 길이 보일지도.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 든다.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일단은 80계층에서 만난 귀환자들과 함께 적들을 쳐내고 방어선 일대를 착실하게 정리했다.
뒤늦게 내 등장을 알아차린 적들이 전략을 바꾼다. 뭉치지 않고 분대 규모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진다.
게릴라 전술이라도 취하려는 건가.
하여튼 귀찮은 것들이다. 오픈홀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대군주 급도 꽤 정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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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지금도. 역시 정우현씨는 뭔가 다르군요.” “후, 도와주시지 않았더라면 귀환하자마자 저승갈 뻔 했습니다.” “정말로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정우현씨, 조만간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80계층 모두가 정우현씨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어요.” 일을 마치고 새로운 귀환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짧은 인연이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니 뿌듯한데.
과연 몇 명이나 무사히 시련을 빠져나왔을지도 몹시 궁금했다. 유달리 친근하게 굴던 총대장 <진>의 모습도 떠올랐다. 물론 그 이전에 내가 지옥 속을 뚫고 올라오며 만났던, 시련 속의 다른 인연들도.
‘다들 잘 살아 있겠지.’ 아무튼 그렇게 헬레스티아의 적습을 막아낸 후.
시간 낭비 없이 곧바로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육체적으론 하나도 안 지치는데 정신적으론 조금 피곤했다. 소파에 등을 기대는데 엘린이 나타났다. 헬레스티아를 공격하러 갔던 각성자들이, 수비를 위해 지구로 되돌아오고 있단다. 그녀에게 80계층 귀환자들의 이야기를 해줬다.

“와, 정말이요? 드디어 뿌려둔 열매가 결실을 맺네요.” “어. 그러게 말이야. 이 타이밍에 돌아와 주면 더할 나위 없지.” “라얌님이랑 유준이도 서둘러서 지구로 복귀중인 것 같아요.” “좋은데? 둘이 나서면 대군주 급도 걱정 없잖아.” “네. 그보다 영원은 어떡하실 거예요?” 엘린의 말에 다시 헤카무트에 관한 걸 떠올렸다.
채팅방에 적당히 이런 저런 필터링을 걸고, 귀염뽀짝의 아이디어를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기본중의 기본이다.
아무튼 모든 이야기를 엘린의 표정이 환해지다가, 잠시 후 다시 조금 어두워졌다. 표정이 왜 이래?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좋은 생각이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거야······ 당연히 위험하겠지. 안 위험하다면 거짓말이지.” “그럼 저랑 같이 가요, 대장. 아시다시피 저 연기력 끝내주잖아요.”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우리 둘이서 가자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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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니. 그녀의 말을 듣자 귀가 솔깃해졌다.
확실히 엘린이라면 급이 다르긴 하지.
애당초 고유 특성으로 목표물의 기억 자체에 간섭할 수 있기에, 연기력의 수준도 본인이 된 것처럼 능수능란 그 자체였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이거 내가 연기하는 것보다 엘린이 샬바르를 연기하는 게 더 유리한 거 아닌가.
“잠시만. 그럼 엘린, 일단 내 기억 속을 들여다 볼래?” “······예? 대장의 기억을요? 어떤 기억이요?” “샬바르의 기억. 오르골로 만들어서 직접 확인해 봐.” “아, 네. 잠시만요. 그러니까 분명 오늘 있었던 기억이죠?” “어.”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을 붙잡는다.
따뜻한 온기가 돌며, 그녀의 이마 앞 허공에서 작고 하얀 빛이 퐁퐁 솟아나기 시작한다. 두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엘린의 고유 특성인 세이프게임 기억(Memory).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스킬은 특성 스킬인 기억의 수호자(keeper of memories)다.

  1. 고유 특성(Personality) : 기억(Memory) * 특성 스킬 : 기억의 수호자(keeper of memories) 1) 기억의 오르골

목표 대상의 기억을 수집, 관리, 전달합니다.
2) 기억의 대행자

목표 기억을 재구성, 절반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사도 샬바르에 관련된 기억이 넘어갔다.
엘린에게 기억의 대행자를 사용해 볼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서 샬바르의 모습으로 변했다.
대박. 일단 외형만 놓고보면 내가 봤던 샬바르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상급 의태 못지않다. 덩치 역시 2.5미터 정도로 커졌다.
“역시. 보면 볼수록 대단한 능력이야.” -대단한 능력? 네깟 녀석이 감히 그 분의 사도인 이 몸을 평가한다고?
“워워, 그 정도면 됐어. 연기력 완전히 소름 돋거든?” -괜찮았어요? 그럼 스킬도 사용해볼까요?
“맞다. 스킬도 쓸 수 있었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속형 안개로 변하는 엘린.
미쳤다. 음험한 분위기에 샬바르 특유의 오러까지 모든 것이 백퍼센트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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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나보다 낫다. 하긴 당연하지 엘린의 능력은 세이프파워볼 ‘의태’ 같은 것이 아니라, 기억을 포함해서 그냥 그 ‘대상 자체로 변해버리는’ 거니까.
물론 금속 안개의 위력은 절반에 불과하겠지만.
“좋아. 그럼 같이 가자. 샬바르 연기는 네가 해.” -어머, 진짜요? 괜찮아요? 저 보기에 조금도 안 이상해요?
“완벽해. 오히려 문제는 내 쪽이겠지. 최소한 넌 절대로 안 걸릴 것 같아.” -대장은 누구로 변하시게요? 적당한 대상이 있나요?
“녀석을 쓰러뜨릴 때, 그 옆에 샬바르의 부관 하나가 함께 있었거든.” 헤카무트의 13번째 사도 중 하나인 성좌 <샬바르>.


아고트 차원의 상황이 위험해지자 그를 탈출시키려던 또 다른 성좌 <보울>.
곧바로 보란 듯이 보울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이렇게 둘이서 헤카무트의 거처에 진입하면 의외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해보자. 해보고 후회하는 게 안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그때부터 약 3일 동안.
엘린과 함께 훈련을 거듭했다.
적의 심장부로 들어가기 위해.
헤카무트 놈들을 속이기 위해. *
삼천대천세계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차원.
그리고 각각의 차원들은 모두 독특한 환경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 아래로 길게 펼쳐진 장대한 세계.
끝없이 깔린 자욱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하늘 위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에 도착한 듯한 기분이었다.
하긴 미지의 세계는 맞지.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평범했던 인간 정우현이 신적인 존재가 되어 차원을 넘나들게 될 줄이야. 그것도 우주를 말아먹으려는 대악당의 보물고에서 물건을 훔쳐내는 게 최종 목표라니. 돌아버리겠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분명 헤카무트 세력의 심장부에 서 있었다.
-자, 심호흡 한 번 하고.
-예. 지금부턴 정신 바짝 차리죠. -그럼 시작할까? 세이프파워볼
-오냐. 먼저 앞장서거라.
연기력 쥑이네 진짜.
엘린의 연기는 언제 봐도 놀랍다.
일단은 고개를 휘휘 둘러 주변의 모든 장소를 관찰하였다. 성좌 <보울>의 기억에 의지해 완벽한 <샬바르>로 변한 엘린과 함께 움직였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양식의 건물을 향해서 다가섰다. 수많은 성좌들이 줄을 서서 경비병들에게 하나하나 신분을 조사받고 있었다.
웃기네 이거. 성좌씩이나 되는 신적 존재가 여기선 경비나 보고 있다니. 아무튼 여기가 헤카무트의 궁으로 이어지는 입구다. 물론 모습을 감추고 몰래 지나치려면 어떻게든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핵심 성좌들의 움직임은 전부 다 헤카무트에게 보고된다. 입구를 지나치지도 않고 나타나면 명백히 이상하다.
-샤, 샬바르님?
-어? 샬바르님이시잖아!
-오오, 샬바르님이 나타나셨다!
-샬바르니이이이임!
-살아계셨군요! 미친. 줄을 서려는 그 때 주변에서 파워볼실시간 함성이 터졌다.
엘린도 조금 당황한 느낌이다. 하긴 잘 생각해보니 헤카무트의 13번째 사도가 줄 따위를 설 리가 없나?


침을 꿀꺽 삼켰다. 수많은 성좌들이 와르르르 순식간에 우리를 향해 몰려든다. 하급, 중급, 상급 성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다.
보울의 버릇을 연기하기 위해서 헛기침을 했다.
충분히 연습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된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존재들이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아무래도 인간보다 훨씬 더 안목이 좋은 성좌들을 대상으로 하려니 더욱 더 그랬다. 맞다. 작은 실수도 칼날이 되어 우리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
극도로 조심해야만 한다.
-오냐, 다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물론입니다, 샬바르님!
-샬바르님, 보울님!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아고트 차원에서 연합 놈들에게 당하신 줄 알았습니다.
-당한 줄 알았다고? 이 몸이 그 따위 놈들에게 말이냐.
그 순간 눈썹을 꿈틀하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엘린.
헐, 소름. 미쳤다, 연기력 보소. 역시 엘린이다.


농담이 아니라 이건 진짜보다 훨씬 더 진짜 같았다.
길가다가 갑자기 마주치면 샬바르라고 착각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내뻗을지도 모를 정도다. 샬바르에 분노에 겁 먹은 성좌들이 전신을 부르르 떤다.
맞다. 샬바르의 성격이라면 여기서 화를 내겠지.
나 역시 억지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좌들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보스가 무시당했으니 화난 부관을 연기해야만 했다.
결국 지금 이 모든 게 이 다음에 있을 위험한 순간, 그 때의 완벽한 연출을 위한 연습의 과정인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죄, 죄송합니다 샬바르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명백히 실언이었습니다!
-흥. 이 몸의 눈앞에서 당장 꺼져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샤, 샬바르님께서 오셨다!
-어이! 지금 당장 문을 열어라!
좌우로 물결처럼 갈라지는 헤카무트 측의 성좌들.
입구를 통과하고 놈들의 모습이 멀어진 그 순간.
둘이서 동시에 안도의 안숨을 푸욱 내쉬었다.
엘린이 샬바르의 얼굴로 히죽 웃는다. 후, 참자. 진짜로 때리고 싶게 생겼지만 이건 엘린이다. 그래, 우현이 이건 샬바르가 아니야.
진정해라 주먹아.
담소를 주고받을 때도 항상 부하와 주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언제나 엘린보다 반 보 뒤에서 걸었다. 만약 여차하는 최악의 상황이 터진다면 내가 그녀를 지켜야만 한다.
굳건히 각오를 다지며 총 열 두 개의 문을 지났다. 수많은 신적 존재들이 우리를 실시간파워볼 향해서 허리를 숙이며 진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경비병들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보울. 아무래도 내 더러운 성격이 도움이 된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샬바르님. 덕분에 쉽게 돌파했군요.
-일단은 우리들의 거처로 이동하자꾸나.
-예. 이제 곧 그분을 만나뵈야만 하니까요.
맞다. 곧 헤카무트 새끼를 직접 알현해야만 한다.
어찌됐건 샬바르는 아고트 행성에서 대패했고, 부관과 함께 둘이서만 살아 돌아왔으니까. 두 성좌의 기억에서 비슷한 경우를 뒤져봐도, 이럴때는 반드시 헤카무트를 알현해서 해명을 해야만 했다. 돌겠네.
생각만 해도 벌써 살이 떨리는데 이거.
일단 동쪽에 위치한 샬바르의 거처를 방문했다.
으리으리한 건물의 규모에 소름이 쫘악 돋는다.
개새끼들. 아주 그냥 우주 전체를 인질로 잡아두고 호위호식을 하고 자빠졌구나. 그나마 다행인 건 저택의 일꾼들이 성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는 속이기 쉽지. 샬바르에게 고용된 묘족의 생명체들이 와르르 달려나와 큰 절을 올린다.
-오셨습니까, 위대하신 주인님!
-주인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계속 기다렸습니다!
-문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목욕물과 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 지금 당장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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