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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에서 진로상담 (1) “이제 제주도에서 별다른 일정은 없지?” 이른 아침, 슬기가 내가 묵는 방에 찾아와서 던진 질문이었다. 눈곱도 떼기 전에 대뜸 일 이야기를 꺼내다니, 놀랍긴 하지만 타박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오전부터 소화해야 하는 일정 몇 가지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대원 길드에 납입할 출자금을 약정하고, 제주도 현지의 프리랜서 헌터들의 면면을 점검하는 일정이었다. 머릿수를 불려야 하니까.
“취소할 수 있어? 나 바쁜데.” “···애초에 네가 함께할 필요도 없는 일정이야. 그런데 왜?” “김해시에 S급 소형이 출현했어.” S급 소형. 이 정도만 해도 상당한 위험도의 게이트이긴 했다. 헌터 전력이 형편없는 소국에서는 메인 뉴스에 등장할 법한 게이트. 물론 한국에서도 무시할 수 있는 게이트는 아니었고.
지금 대한민국에 S급 게이트를 사망자 없이 토벌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한 주체는 여섯 개였다.
내 눈앞에 있는 슬기, 호남의 로컬 길드이자 S급 헌터인 ‘검성’이 이끄는 무학 길드, 그리고 4대 대형 길드도 S급 게이트를 토벌할 수 있었다. 사실 대형 길드에 몸담고 있는 S급은 한 명뿐이지만, A급 헌터를 10명씩 밀어 넣으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원톱은 당연히 슬기였다. 세이프게임
“네가 맡으려고?”
“응.”
“···그래. 남은 일정은 나 혼자서 소화할 테니까 너는 김해시로 가. 출장 말미에 돈 시원하게 벌고 돌아갈 수 있겠네.” 슬기가 A급 게이트를 토벌하고 받는 수당은 20~30억이었다. 그리고 S급 게이트는 최소한 60억부터 시작하는 것 같았다. 4~6인 파티가 나눠 먹는 돈을 혼자 받아먹고 있어서 가능한 거액이었다.


‘사실 토벌 속도까지 고려하면 이보다 더 받아도 되겠지만.’ 슬기의 가격 정책은 나름 양심적이었다. 무력시위를 벌여서 더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많은 수입이 위화감을 일으킬까봐 걱정한 건지 알아서 자제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제해도 너무 많아서 그렇지.
“이미 수락했어. 지금 가려고.” 축하한다. 입 밖으로 내기가 귀찮아서 그냥 고개만 끄덕여주고 말았다. 어차피 지금 슬기한테 몇십억 보태봐야 대해에 물 한 컵 붓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용무를 마친 뒤에도 슬기는 나가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나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네가? 정말?
“···오빠가 말한 이미지 관리라는 걸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고. 처음에는 기부활동을 시작할까 했는데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더라구. 그냥 생색내기처럼 비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급하게 말을 지어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냅다 천억쯤 지르는 게 아니라면야.” 기부는 의외로 선전 효과가 크지 않다. 게다가 지금 슬기가 기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10곳 이상의 기부처에 돈을 뿌리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칭찬은 못 받고 있었고.
“기부보다는 내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고 싶었어.” 슬기의 특성이라.
떠오르는 게 몇 가지 있었다. 호구 기질, 올해 안에 현금성 자산으로만 1조를 찍을 수 있는 갑부, 그리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솔로잉을 뛰는 헌터. 당장 떠오르는 건 이 정도인데.
아, 솔로잉. 세이프파워볼
나는 슬기가 뭘 하려는 건지 대충 감을 잡았다. 파워볼사이트


“혼자서 무쌍 펼치는 걸 그만두겠다는 거네.” “그만두는 건 아니고 줄일 의향은 있어.” 슬기는 “이걸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있을까?”라며 나를 은근히 떠보았다. 아직 잠결이지만 슬기의 아이디어를 평가할 정신 정도는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림만 잘 짜면 활용할 건덕지가 있겠네.” “그럼 짜줘.”
갑작스럽고 쓸데없는 요구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슬기가 그동안 혼자서 다닌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가 편하기 때문이었다.
슬기의 스타일 자체가 홀로 괴수를 썰고 다니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슬기의 이능, <엄습하는 인영>이라고 했던가. 본인의 존재감을 감춘 채 멍때리는 괴수들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애한테 어설픈 동료를 붙여주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동료 달고 들어간 게 언제야?” “···S급 대형이 출현하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두어 명 달고 들어가긴 해. 나한테 호흡 맞출 수 있는 헌터가 몇 명 있거든.” 헌터업계 내부에서 협회장 친위대쯤으로 분류되는 헌터가 두세 명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나 슬기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아니, 단순히 방해가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능으로 존재감을 은닉한 슬기 대신 애꿎은 동료들이 표적이 될 테니까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시체만 복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슬기에게 짝을 지어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기적인 이능을 아예 봉인하면 되지 않는가.
“슬기야. 혹시 너 레벨이.” “잠깐만. 상태창 띄워본 적이 거의 없어서. 가끔 제멋대로 나타나긴 하는데. ···어, 지금 보니까 94네.” ···말도 안 되는 레벨이었다. 레벨이 곧 헌터 등급과 직결되는 건 전혀 아니지만, S급 헌터가 해당 등급에 진입하는 레벨은 보통 70 내외였다. 대부분의 헌터는 경력이 끝날 때까지 노력해도 그 근처조차 갈 수 없었고.


“대한민국 게이트는 혼자서 다 치웠나 보네. 그 정도면 굳이 이능에 기대지 않아도 웬만한 게이트는 대응할 수 있을 텐데.” “일부러 안 쓰고 싸울 때도 있어. 허망하게 두리번거리는 애들 쑤시는 게 지루할 때가 종종 있어서.” 슬기가 자체적으로 낸 견적에 따르면 S급 소형까지는 이능을 쓰지 않고서도 단독으로 치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물론 조깅하는 기분으로 해치우는 건 힘들고 조금은 ‘인간적인’ 싸움을 해야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활용할 건덕지가 있었다. 세이프파워볼
“그럼 B급 헌터 한 명쯤 지키면서 싸우는 것도 가능하겠네.” “포지션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응.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나중에 타이밍 잡아서 B급 유망주 한두 명 데리고 게이트에 들어가. 그리고 네가 이능을 쓰지 않은 채로 싸우면서 유망주들한테 경험치만 먹여주면 되지.” “···그게 무슨 소용인데?” “무슨 소용이긴. 네가 일주일 두 개꼴로 아무런 생각 없이 깨는 게이트가 어떤 사람한테는 꿈의 영역일 수도 있어. 네 보호를 받으면서 고위험 게이트를 안전하게 경험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기회가 없겠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 그게 다야?” “아니야. 당연히 그걸로 끝내면 안 되지.” 슬기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경험치와 정수를 꾸역꾸역 받아먹을 기회. 이건 제정신 박힌 신입 헌터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기회였다. 동급 헌터보다 한 발짝 앞서가는 계기가 될 테니.
이 정도의 기회를 공짜로 내줄 수는 없었다.

“네가 뉴비랑 게이트 한두 번 같이 돌아주는 대신, 그 수혜자한테는 지방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일하도록 하면 어떻겠냐?” “아, 그럼 되겠네.” 여기서 말하는 지방이란 당연히 제주도였다. 정확히는 내가 소유한 대원 길드.


현재 대원 길드 소속의 헌터는 13명이었다. A급 1명에 B급 10명, 그리고 C급 2명. 제주도를 커버하기에는 살짝 부족한 숫자였다.
제주도에는 일주일에 2~3개꼴의 게이트가 등장하고 있었다. 헌터 한 명이 일주일에 게이트 한 번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걸 고려하면 헌터들의 머릿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기왕이면 양질의 인력을 받는 게 좋겠지.’ 만약 유망한 신입 헌터를 대원 길드에 5~6개월쯤 묶어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이점이었다. 헌터로서 밥벌이하는 요령을 익히는 중요한 시기에 대원 길드의 색채를 씌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싹수 있는 애들을 주저앉히는 데 성공한다면 대원 길드를 키우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될 터.
“물론 제주도가 좀 그렇다면 경우에 따라 강원도나 경북에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만.” “그냥 제주도로 보낼게. 어차피 다른 지역은 수도권이랑 큰 차이도 안 나니까.” “그렇게 해주면 고맙고. 잘만 풀리면 네 이미지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네가 수고 자처하면서 공익에 기여하는 거잖아.” “알았어. 생각해볼게.” 슬기는 내 아이디어를 기꺼이 접수했다.
이만하면 제주도 출장의 성과는 차고 넘치는 셈이었다. 혹시 시간이 남으면 제주도에서 휴가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슬기는 게이트나 치우라고 김해시로 보낸 다음 혼자서 호젓하게그런데 어째서인지 슬기가 용무를 마친 뒤에도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그럼 나랑 게이트 좀 들어가자, 오빠.” 세이프파워볼 “···김해시의 그 S급?” 내가? 왜?
“다른 헌터 보호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익히고 싶어서. 어설픈 애들 잘못 데리고 들어갔다가 실수로 죽이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B급이면 눈먼 칼에 한 번만 잘못 맞아도 죽을 텐데.” 즉 스스로 안위를 지킬 수 있는 나를 인간 교보재로 활용해서 요령을 깨우치고 싶다는 소리였다.
나는 슬기랑 싸워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테고. 하지만 최소한 슬기의 눈먼 칼에 맞아서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역삼게이트에 있던 시절에 팀킬 시도하는 애들이 워낙 많았던 터라.

‘하긴, 나 말고 적임자가 없긴 하겠네.’ 이 와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슬기의 의중이었다.
슬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빨리 대답하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스스로 밝힌 목적 말고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지 개선 어쩌구 한 것부터가 핑계인지도 몰랐다.
“···이런 식으로 복귀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실시간파워볼 네가 먼저 제안할 줄도 몰랐고.” “며칠 전까지는 나도 오빠가 게이트 들어가는 건 원하지 않았어. 가능하면 오랫동안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최근 풀린 영상 때문에 의심이 풀렸다는 거네.” “게이트 PTSD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마냥 놀 수는 없잖아? 감각 회복하는 차원에서 나랑 같이 들어가는 건 오빠 입장에서도 괜찮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메리트가 있었다.


일단 돈이 모자랐다. 역삼게이트 보상금이 나오는 건 다음 주. 그리고 그중 일부는 대원 길드에 출자해야 하기 때문에 수중에 남는 돈은 줄어들 예정이었다. 굳이 떼돈 벌 기회를 거를 필요는 없었다.
“···괜찮지. 공짜로 뛰는 조건만 아니면.” “지금 당장 가는 조건으로 절반 떼어줄게.” 그럼 무조건 해야지.
슬기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딱히 긴장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골육상잔이라도 벌이려는 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맞춰줄 의향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전화를 들었다.
“상규야. 아침부터 미안하지만 방호구 좀 빌려줘라.” 나는 조상규에게 사이즈도 안 맞는 방호구 세트를 빌린 뒤 공항으로 향했다. 딱히 필요해서가 아니라 관광객 포스로 게이트에 들락거리는 모습을 노출하면 안 되기 때문에 챙긴 것뿐이었다.
‘슬기한테 이미지 관리하라고 주문한 주제에 정작 내가 설렁설렁 다니는 것도 좀 뭣하지.’ 잠시 후 김해에 도착한 우리였다.
우리를 마중한 게이트관리위원회 과장급은 슬기가 대체 누구의 로비를 받고 이토록 신속하게 와준 건지 굉장히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나도 얘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웃음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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