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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위원장 최훈민 (7) 나는 슬기에게 가족연대가 조만간 민낯을 보일 거라고 예고했다. 네가 원하면 생각보다 빨리 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고.
물론 내가 관심법을 구사하는 것도 아닌데 가족연대 개개인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순 없었다.
그러나 50억이나 되는 돈을 반강제로 기부하게 생긴 최훈민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만약 그만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애초에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고.
최훈민이 갑자기 개심해서 안빈낙도하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내가 물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최성칠과 권슬기라는, 대한민국 헌터업계의 정점에 있는 인사들의 등판에 빨대를 꽂고 이권을 빨아먹던 인간이 그렇듯 쉽게 물러날 리가 없다.
“최훈민이 기부 자체는 거부하지 않을 거라고 봐. 다만 지배권은 놓치지 않겠지. 그 와중에 다른 유족들도 끌어들일 거고.” “···뭘 근거로 그렇게까지 확신하는 거야? 가족연대가 무슨 양떼도 아니고 오빠 의도대로만 움직일 리가 없잖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조만간 가족연대 측에서 너한테 접촉할 거야.” “알았어. 오빠. 그런데 만약 오빠 말이 틀리면···.” “틀리면 뭐?”
슬기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리기에 그냥 선수를 치기로 했다. 세이프게임
“내가 오해한 거라면 가족연대 사무실까지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직접 사과할게. 어차피 협회 건물 8층인가에 가족연대 사무실이 입주해 있다며? 아마 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건 딱히 특혜가 아니라.”

“알아. 공실이 생겨서 준 거겠지. 헌터협회 건물이라고 꼭 협회 전용으로 쓰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일개 가족단체 사무실이 헌터협회 본진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 좀 특이하긴 해. 그렇지?” “···굳이 따지면 특이하게 보일 수도 있겠네.” “국가에서 지정한 나급 보안시설이잖아. 거기에 사단법인이 입주해 있으면 오해받기 십상이야.” 내 경고가 적중할 경우 협회에서 가족연대를 쫓아내라는 의도로 던진 말이었다. 그 의도를 이해한 건지는 몰라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슬기였다. 잠깐 사이 눈에 띄게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약속한 거야, 오빠.” 이렇게 당부한 뒤 스르르 몸을 일으킨 그녀였다. 그리고 버릇처럼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려고 하는 그녀였다.
슬기가 주당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반주로 한두 잔 홀짝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최소 35도 이상의 독주를 꼴꼴거리면서 들이마시는 말술이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웬만한 고도수 전통주는 다 섭렵한 듯했다.
물론 상위랭크 헌터라면 마력으로 주정을 몰아내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게이트를 토벌하다 보면 메탄올보다 10배쯤 독한 사기나 독기에 노출되는 일도 흔한데 그까짓 술기운이 뭐가 대수겠는가.
그러나 슬기는 주정을 몰아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취한 상태를 일부러 즐긴다는 뜻이었다.
음주 취향은 존중하지만 지금은 술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슬기가 술병을 따기 전에 슬며시 제지했다.
“슬기야. 그거 도로 집어넣고 협회로 돌아가라.” “뭐?”

“오늘··· 늦어도 내일 아침까지 그 사람들이 너한테 찾아오거나 연락할 가능성이 커. 정신이 탁해지면 상대하기가 좀 힘들 거야. 술은 내일 마시고 그냥 맨정신으로 출근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가족연대의 바닥을 목격하고 나면 술 생각이 절로 날 테니 그때 마시는 게 상책이었다.


“지금?”
“그래. 지금.”
나는 슬기에게 외투까지 가져다주면서 채근했다. 슬기는 날 어벙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오픈홀덤
‘이건 아니야.’
떠밀리듯 협회로 돌아온 지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슬기는 연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50평 남짓한,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화려한 회장실이 오늘따라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장관 출신이었던 전대 협회장이 세종청사 장관실 규격에 맞춰서 꾸며놓은 회장실이었다.
슬기는 오빠를 무시하고 싶지 않아서 회장실을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기가 조금 힘들기도 했고. 하지만 그녀의 인내심도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차라리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오빠를 폄훼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연대가 오늘 당장 추태를 보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몰염치한 이들이었다면 슬기 본인이 진작 눈치를 챘을 테니까.
슬기가 연신 자리를 들썩거리고 있던 그때, 비서실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최훈민 위원장님이 왔습니다. 늦은 시간인데 어떻게 할까요?” 비서의 목소리에 난처함이 묻어났다. 자정을 갓 넘긴 시각. 휴일근무와 야근이 판치는 곳이 협회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무공간은 비어 있었다. 하필 이 시간에 찾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안으로 모셔.” 권슬기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떨떠름하게 허락해주었다. 자기도 모르게 오빠가 건네준 팁을 떠올리면서.

  • 괜히 오늘 움직일 거라고 예단한 게 아니야. 날이 바뀌면 가족연대를 규합하기가 힘들어질 테니 곧바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거든. 실제로 대면하면 불편한 내색하지 말고 평소처럼 차분하게 대해줘.
    오빠가 태연한 투로 읊조린 몇 마디가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최훈민이 회장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영결식 때 입었던 상복을 그대로 걸치고 있었고, 세수도 안 했는지 피부는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슬기야. 어이쿠,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권 회장.” “편하게 말하세요, 아저씨.” 최훈민은 슬기가 회장실을 지키고 있다는 걸 알고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회장실을 점거한 채 자신을 급히 불러낼 요량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래서 뇌리를 스쳤다.
    아니, 아니다. 아직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였다. 최훈민이 급하게 들이닥친 것도 너그러이 이해해줄 수 있었다. 50억을 선뜻 내놓을 생각이 있다고 해도 출연하기 전에 상의는 거쳐야 하니까.
    하지만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로투스바카라
    최훈민과 함께 패거리를 이뤄서 들어온 유족들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열댓 명이었다.
    당연하지만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이었다. A급 태원호의 아버지와 어머니, S급 서남원의 미망인, A급 김리노의 여동생 등등. 지난 10년 내내 지겹도록 부대끼면서 지낸 이들이었다.
    최훈민만큼 친한 건 아니지만 그들 또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연대를 수익모델로만 여겼던 몇몇 찌든 이들의 일탈을 함께 통제했던 고마운 동지도 있었고, 가족연대의 평판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이미지 개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친 이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단일대오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영결식이 끝난 이후 줄곧 함께 행동한 듯싶었다.

  • ‘뭔가, 사정이 있겠지. 훈민이 아저씨랑 같이 움직인다고 꼭 나쁜 의도라는 법은 없잖아.’ 가능하면 믿어주고 싶었다. 혹시 속물적인 의도로 찾아왔다고 해도 무작정 배척할 생각은 없었다. 50억은 그만큼 큰 돈이니까. 10년의 기다림을 돈으로 보상받으려고 드는 게 꼭 잘못은 아니니까.
    하지만··· ‘떳떳하다면 그냥 가지면 되잖아. 굳이 나한테 찾아올 필요 없이.’ 슬기는 최훈민의 곁에 서 있던 유족들과 차례로 눈을 맞췄다.
    움찔하면서 어색하게 턱을 쳐드는 모습, 애매하게 웃다가 결국 시선을 외면하는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가족연대를 위해 몸 사리지 않고 일했던 슬기에게 처음으로 의구심을 품게 하는 모습이었다.
    슬기는 일단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미 턱밑까지 차오른 의심이 그저 의심으로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윤기 씨 아니었으면 우리가 패륜아가 될 뻔했어. 생각 없이 그 50억 받았으면 생때같은 새끼들 목숨값으로 호의호식한다고 삿대질이나 당했을 거 아니야.” “그럼요, 그럼요!”
    “그 돈이 어디 온전히 우리 돈인가요? 따지고 보면 돈이 아니라 족쇄야.” “맞아. 큰 돈 받아먹었으니 이제부터 딴소리하지 말라고 구시렁거리는 사람이 들끓겠지. 예전부터 우리한테 이상한 누명 뒤집어씌웠던 것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휴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네.” “그래도 말이지···. 권윤기 그 친구가 이번에 좀 너무하긴 했어요. 발표하기 전에 우리한테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지금 누굴 탓해? 말조심해.” 슬기는 유족들의 구수한 대화를 듣다가 일단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본론부터 밝히라며 채근하고 싶었지만 지금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이들이 어떤 속셈, 아니 속내로 한밤중에 들이닥친 건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사전에 상의하지 못한 점은 죄송해요. 오빠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거든요.” “상의가, 없었다고?” “예. 전 몰랐어요. 실은 지금 여기 와 있는 것도 오빠한테 왜 그랬냐고 따져 묻다가 어색해져서 그런 거고. 직원들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슬기가 형식적으로나마 유감을 표명하자 최훈민은 당치도 않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털었다. 본인은 감히 목소리 낼 주제가 안 된다는 듯이.
    “윤기 씨가 뜻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겠지.”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권 회장, 있잖아. 아무래도 우리는 영 불안해. 요즘 기부단체 중에 흉악한 것들이 좀 많아야 말이지. 공신력 있는 단체에서도 기부금으로 성과급 파티하는 일이 빈번하거든.” “미심쩍은 곳이 많긴 하죠.” “미심쩍은 정도가 아니라 사기꾼들 천지라니까!” 갑자기 모금단체의 폐단을 줄줄 외기 시작한 최훈민이었다.
    수백억을 모금한 뒤 운영비로 70퍼센트를 쓰고 공익활동에는 30퍼센트만 지출하는 극악한 가성비의 단체, 연말마다 대기업 수준의 상여금 파티를 벌이는 단체의 폐해를 세세하게 나열하는 식이었다.
    그럼 기부처는 신중하게 결정해야겠네요, 한참 듣던 슬기가 못 이기는 척 한 마디 덧붙이자 최훈민이 기다렸다는 듯 “권 회장도 아네.”하면서 탄성을 뱉었다. 유족들도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권 회장. 우리가 생각을 해봤는데.” “무슨 생각이요?” 로투스홀짝

  • “차라리 우리가 직접 집행하는 것도 방법 아닐까? 실은 영결식 끝나고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서 의논한 내용이 있어.” 슬기는 대답 대신 어서 말해보라면서 손짓했다. 최훈민은 이상한 기색을 눈치 못 챈 듯 넉살 좋게 웃으면서 유족들과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본인이 대안이랍시고 가져온 내용을 투척했다.
    “공익법인을 하나 설립하려고 해.” 슬기의 눈동자가 결국 질척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다문 입가는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다.
    비록 세종시와 여의도에서 ‘적폐 퀸’ 소리를 듣고 다니는 회장이지만, 기본적인 표정관리는 할 수 있었다. 문광부보다 큰 예산을 굴리는 협회의 장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설마 그 처세술을 훈민이 아저씨한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10년의 신뢰가 본격적으로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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