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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로롱
“정령왕님, 소환 콜 왔어요. 정령왕님? 아이참, 일나세요오.” 작고 보드라우며 몰캉한 뭔가가 내 팔을 잡고 흔든다.
“으음.”
“여기, 새벽과 이슬의 정령이 모아온 물이에요.” 꽃잎을 겹쳐 만든 잔에 투명한 물이 찰랑거린다. 건네주는 조막만 한 손을 따라 올라가니.
“왜 그러셔요?” 델라 공주가 거기에 있었다.
‘어려.’
성인 여성이 아니라, 다섯 살 꼬마 아이의 모습으로.
“어서 드시고, 소환에 답하셔야 해요. 소환술사가 어마어마한 대가를 바쳤어요. 이거라면, 망한 정령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물을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자, 과연. 영상에서 서기관이 말했듯이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푸름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대지. 곳곳의 크레이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회색으로 물든 하늘. 정령들은 바나나잎 같은 기다란 잎사귀로 만든 둥지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많이 다쳤어요.” 나의 시선을 따라가던 델라가 고개를 숙이고 울듯이 중얼거린다. 파워볼게임
“하지만 대지와 어머니의 정령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돌봄의 정령을 믿거라. 그는 사막에서 해바라기를 피운 정령이란다.’ 바로 정령왕님이죠!” 나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이 초롱초롱하다.
“앗. 정령왕님! 소환의 문이 사라지고 있어요. 같이 갈 사람을 모아볼까요? 여차하면 저라도 갈게요.” “되었다.” 델라의 머리칼을 투박하게 쓰다듬고는 저 앞, 적청으로 빛나는 문을 향해 걸었다.
“알, 조심하세요!” 뒤에서 외치는 델라의 말에 등을 더듬으니 새하얀 알이 양파망 같은 망태기에 담겨 있다. 혹시나 이동 중에 떨어질까 배낭을 고쳐 매듯이 확실하게 추켜 올린 뒤 문을 넘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델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올 때, 맛있는 거 가져오세-” *

“할아버지, 정령왕 빨리 나오라고 하세요. 쟤가 마왕입니다.” 문을 넘으니, 정확히 좌우로 갈라진 가르마가 인상적인 청년. 용사가 불평을 쏟아낸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고 알이 담긴 망태기를 넘겼다.
“잘 보관하도록. 알이 다치면 네 목숨도 없다 여기거라.” “예?”
산성화, 물리 충격 무효화.
마왕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아직 그만한 힘을 가진 정령이 남았나.” 주포틀.
“흠!”
내 머리 옆으로 생성된 두 개의 주포. 포구는 마왕의 머리와 가슴에 고정. 마왕은 목을 꺾으며 몸을 풀곤 주먹에 검은 채찍을 휘감으며 옥좌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오만하게 내뱉는 한 마디.
“선공은 양보하지.” 전투자세를 취하고 대기하는 마왕의 뿔을 잡고 당기는 상상을 강하게 하자, 애시드 올 마이티와 인력이 동조해 내가 원하는 바를 수행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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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갑자기 머리가 끌려가자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고는 서른 개의 발가락으로 밀실의 바닥을 붙잡으려 했으나.
[다수의 자아가 힘을 더합니다.] 『저도 도울게요!』 지면이 부서저 마왕이 공중에 들린다. 선공을 양보한다는 제안이 아직 유효한지, 놈은 가드를 올릴 뿐 공격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야 좋지.’ 슬라임화
지척까지 날아온 마왕. 얼굴 앞을 막은 두꺼운 팔 사이로 산성화된 슬라임을 밀어 넣었다. 과연, 인간의 피부와는 달리 쇠에 떨어진 기름처럼 그저 흘러내린다.
‘어차피 목적은 틈을 벌리는 것.’ 주포틀 하나는 아래에서 팔꿈치를, 다른 하나는 가드 너머, 마왕의 입을 겨누어 놓고.

“발포.”
초당 4발의 대기포단이 마왕의 육체 위로 쏟아졌다.
『이번엔 여기군요! 좋아요, 갑니다앗.』 포탄의 속도와 파괴력이 한층 증가한 게 눈에 보인다. 열 발 만에 가드가 날아간 마왕은 연사의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뒤로 밀려 나간다. 끝내 벽에 등이 닿았고, 밀실에는 고기를 다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마왕의 몸에서 나온 피와 밀실의 바닥이 긁혀서 생긴 먼지가 섞여 벽 부근에 일시적으로 검은 안개가 형성된다.
“…위대하신 정령왕님.” 돌아보니 용사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조금 전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무례를 알긴 아느냐.” 머리를 바닥에 쿵 찍으며 다시 한번 사죄를 고하는 용사. 이만하면 됐다 싶어 그에게 말을 조심하라 이르고 품에 안고 있던 망태기를 받아 들려는데.
“아, 직.” 검은 안개 속에서 스산한 한기가 감도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둠 속 적안이 좌우로 위빙을 하는가 싶더니,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순간 내 앞에 전신이 붉게 변한 마왕이 주먹을 뻗고 있었다.
물리 충격 무효화.


『갑니다아!』 가슴 정중앙을 관통한 마왕의 주먹. 실시간파워볼
‘이 정도야. 커헉!’ 시야가 휘청인다.
“쿨럭.”
속이 뒤틀리고 산성이 증발하며 놈의 육체에 닿은 부분이 검게 변색된다. 재빨리 몸의 형태를 변환. 마왕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환부를 도려냈다.
『조심하세요, 단순한 물리력이 아니에요.』 석탄으로 달리는 기차처럼 전신에서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마왕이 내게 정권을 먹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한동안 움직일 수 없나?’ 방금 마왕이 보인 움직임은 내 눈만으로는 도저히 쫓기 힘든 속도.
“외충을 상대할 때나 쓰는 기술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정령.” “기술명은?” “없다.”
다시 몸을 풀고 제자리에서 통통 뛰며 나를 노려보는 마왕. 시야가 본래대로 돌아오질 않는다.
‘일격에 이만한 위력.’ 앞으로 두어대만 더 맞으면 실패 확정. 간절히 부탁하던 성인 델라와 맛난 거 가져오라던 어린 델라의 얼굴이 겹쳐진다.
‘마지막 남은 스크롤이라고 했었지. 거기에 재도전 불가능 조건.’ 빡빡하다.

하아.
‘난이도가 괜히 높았던 게 아니었어. 어쩔 수 없지.’ 얼마 전에 우리끼리 투표를 한 적이 있다. ‘전투에 최적화된 사람은 누구?’라는 주제에서 1등은 만장일치로.
‘초수신공, 모스.’ 브어어어
-좁다.
‘나오지 말고, 내 몸에 들어와.’ -재밌겠군.
“정령, 벌써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 몸을 좌우로 흔들며 내게 다가오는 마왕. 그리고 좀 전처럼 사라졌다 싶은 순간. 모스가 내 육신에 경어종의 형태로 강림. 원하면 우주선마저 시각으로 감지하는 녀석의 감각은 마왕이 움직이는 궤도를 정확하게 읽었다.
허공을 가르는 마왕의 주먹. 팔과 주먹에서 터져 나오는 충격파로 옷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인다. 파워볼실시간
“큽!”
대뜸 마왕의 복부에 내 주먹이 박혔다.
‘모스, 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마라.’ 회피는 나, 공격은 모스. 지금 그렇게 움직였다.
-간만에 즐겁다.


모스는 듣고 있지 않았다. 복부를 맞아 몸을 숙인 마왕의 턱에 니킥을 먹이고 이어서 꼬리지느러미로 어퍼컷.
‘잠깐, 꼬리지느러미?’ 흘낏 눈을 돌려 엉덩이 부근을 살피니 머리에서부터 이어지는 지느러미가 파닥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모스만 조작이 가능한 모양.
‘잠깐만, 그럼 전에 케프를 강림시켰을 때도 꼬리가 생겼었나? 수염은 없었는데? 아.’ 케프는 기계 고양이. 거슬리는 수염이 필요 없다.
“크흐, 크흐흐흐.” 천장에 박혀 웃는 마왕과.
브어어어
그에 동조하는 모스.
‘울음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야. 등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확인을 위해 몸을 옆으로 트는데, 팔이 저절로 움직여 뭔가를 낚아챈다.
“큭.”
물갈퀴 너머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마왕이 보였다. 당혹을 숨기고 입을 열었다.

“나와 대화할 의향이 있나?” 타오르던 적안이 차갑게 식는다.
“죽여라.” -정말 포기했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모스가 마왕의 머리를 뭉갠다.
“그걸 바로 알 수 있나?” -굴복의 냄새. 혐오스럽다.
나도 포기하고 굴복했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고생했다.” 초수신공, 해제.
브으으으
-좀 더.


거부의 의사를 표하는 모스. 녀석이 계속 나와 있으면 의지력 소모가 감당이 안 된다.
“들어가서 케프랑 놀고 있어. 나중에 싸울 일 있으면 또 부를 테니까.’ -약속해라.
“약속할게.” 비로소 정령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고, 바퀴벌레를 연상시킬 정도로 벽에 찰싹 달라붙은 용사를 불렀다.
“와.”
“옙.” 파워볼사이트
또 태도가 바뀐다. 이 녀석, 강약약강이구나.
하여튼 정리는 됐다.
사후세계의 델라 공주가 돌봄이 속성을 가진 정령을 원했던 건, 바로 이 새하얀 알에서 후대의 정령왕을 온전히 키워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왕이라는 큰 산은 넘겼으니 이제 정령계로 돌아가서 보살피기만 하면 순조롭게 클리어되리라.
“나를 돌려보내라.” “예?”
“정령계의 문. 열어.” 용사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린다.
“돌려보낼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 “아, 아, 아니요. 당연히 있습니다. 저, 마왕의 부산물을 모아야 소환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덜컥.
굳게 닫혀있던 쪽문이 열린다.
“거짓말이야. 소환술은 그런 식으로 발동하는 게 아니거든.” 밀대와 물통을 담은 수레를 끌고 들어온 난쟁이 소녀. 통통한 볼이 말을 할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린다.

“물러나십시오. 수상한 녀석입니다.” 용사가 나와 난쟁이 사이에 선다.
“너, 동료의 보물을 미끼로 던져서 살아남고 지금도 조상의 유품으로 위기를 넘겼지? 용사라는 호칭이 아까워. 아니지, 타인의 도움을 받는 재능은 용사답네. 칭찬해줄게.” 난쟁이는 귀엽게 생긴 외모와 달리 독설을 거침없이 입에 담았다. 용사의 안면이 구겨지며 고성을 지르기에 어깨를 잡고 꾹 눌러 진정하라고 말하자, 녀석은 씩씩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비로소 조용해진 밀실, 난쟁이에게 물었다.
“정령의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나?” 알이 부족함 없이 성장하고 태어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게 나의 역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마왕의 시종 노릇을 하는 난쟁이든, 걸어 다니는 해골이든 정령계의 문만 열어주면 아무 상관 없다.
“알지요. 너무 많이 알아요,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난쟁이는 용사를 대할 때와는 달리 공손한 태도였다.
‘지금은?’ “계속 말하라.” “1시간 후면 새로운 마왕이 나타나요. 그게 2번 마왕이죠. 그렇게 10번 마왕까지 해치우면 쓸만한 정령석이 떨어질 거예요. 그걸 백 개를 모아서 제게 주시면-” “미친 소리다!”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난쟁이를 노려보던 용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난쟁이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나를 직시한 채 말을 이었다.
“문을 열어 정령계로 돌려보내 드릴게요.” 흐음.
‘모스.’
-불렀나.
‘워프로 정령계로 못 가나?’ -갈 수 있다. 내 입에 타면 얼마든지.
오케이, 포기.
‘정말, 도저히 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 하자.’ 모스는 재미 삼아 나를 먹어버릴지도 모른다. 방금 한 말에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고. 내 편에서 싸워주기에 아군인 것 같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잠재적 적이자 경쟁자의 위치다.
가만 생각하면 내 허락받고 표면세계에 들어온 것도 아니지.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 세이프파워볼렵겠지?’ [송구합니다, 폐하. ‘계’를 넘을 정도의 기술은 개발하지 못했나이다.] 좋아. 신성들이 좋아할 만한 전개가 되겠네.
“저는 청소가 끝나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 마왕을 해치우시면 별도의 서비스가 제공되니 부디, 위기를 이겨내시길.” 난쟁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청소도구를 들고 쪽문을 밀고 나갔다. 용사는 난쟁이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벽으로 변한 쪽문으로 달려가 밀거나 두드려본다.
“안 열립니다.” 그렇겠지.
한 시간 후.
밀실의 천장에서 백색의 옥좌 위로 적색의 빛이 쏟아져 내렸다. 빛이 거두어졌을 땐, 빙빙 꼬인 산양의 뿔을 한 근육질의 악마가 육체미를 뽐내는 자세로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허억, 너,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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